그 집, 냄새로 기억나 – 향기로 떠오르는 삶의 조각들
어릴 때 외할머니 집에 가면 꼭 나는 냄새가 있었다.
시골 아궁이에서 피워 올린 연기 냄새, 오래된 장롱 속 묵은 이불 냄새, 그리고 언제나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된장국 향. 그 냄새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그 집만의 고유한 향기.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을 때, 문득 길을 걷다 어느 집 굴뚝에서 풍겨오는 나무 연기 냄새를 맡고는,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집 냄새다.”
그 한순간의 향기로, 나는 그 집의 기억으로 순간 이동했다.
후각은 기억을 가장 오래 붙잡는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이고 감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은 '후각'이다.
눈으로 본 풍경은 시간이 지나 흐려지지만, 냄새로 느꼈던 기억은 오래도록 또렷하게 남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라고 부른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의 향기로 유년의 추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냄새는 뇌의 ‘감정 기억’과 연결돼 있어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다시 꺼내놓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종종 장소를 냄새로 기억하고, 사람을 향기로 기억하고, 시절을 향수로 기억한다.
나는 그 사람을 향기로 기억한다
첫사랑은 언제나 그 사람만의 향기가 있다.
그 사람이 즐겨 뿌리던 바닐라 향 향수, 겨울에 입던 니트에서 풍기던 보송한 섬유유연제 냄새, 손 잡을 때마다 살짝 스친 손등의 기름기 냄새.
누군가는 “추억은 시각과 청각으로 남는다”고 하지만, 나는 믿는다.
가장 오래 가는 사랑의 기억은 향기로 남는다는 걸.
사랑이 끝나고 나면 향기마저 미워지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전철에서 같은 향을 맡게 되면 가슴이 울컥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건 미련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다.
공간마다 고유한 향이 있다
집에는 '그 집만의 냄새'가 있다.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서면 나오는 나무 마루 냄새, 자취방의 라면 국물과 섞인 세탁세제 냄새, 갓 리모델링한 신축 건물의 페인트 냄새…
공간의 향기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시간, 삶의 방식,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할 때마다 "집 냄새가 익숙하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 사람의 체취와 생활이 녹아들기 전까지 그 공간은 아직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향기 하나로 나를 위로하는 법
요즘은 향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디퓨저, 향초, 룸 스프레이, 향수…
다들 저마다의 향기를 공간에 들이고, 몸에 입힌다.
왜 향을 찾을까?
아마도,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잠깐이라도 내가 머물 수 있는 정서적 피난처가 필요해서일 것이다.
향은 그 공간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주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은 레몬 향을 맡으며 아침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라벤더 향 속에서 잠이 든다.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감정의 장치다.
밤의 향기, 감정의 색깔
밤이 되면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햇빛이 사라지고 감각이 예민해지는 시간, 향은 더욱 선명해지고 마음은 더 섬세해진다.
어떤 밤은 커피 향 같고,
어떤 밤은 찬 바람 같은 풀 냄새 같고,
어떤 날은 뜨거운 찜질방에서 맡았던 때비누 냄새처럼 묘하게 인간적인 향이 스며든다.
그 향들 속에서 우리는 그날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고, 다음 날을 준비한다.
향기란, 삶을 기억하는 언어다
우리는 수많은 냄새 속에서 살고 있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중 나만이 기억하는 향기다.
누군가에겐 엄마의 파 마늘 볶음 향이,
누군가에겐 아빠 셔츠에서 나는 면 냄새가,
누군가에겐 병원 대기실의 알콜 냄새가
인생을 통째로 기억하게 만드는 열쇠일 수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지나가는 바람에서, 옷장에서, 주방에서 스치는 냄새를 유심히 맡아보자.
그 안에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그리움과 사랑과 시간이 살며시 묻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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